일시: 2019년 12월 29일(다섯째주 일요일) 날씨: 흐림
산행지: 경남 통영시 욕지면 욕지도(欲知島, 해발 392M)
산행코스: 여객선 터미널☞ 면사무소☞ 태고암☞ 천왕봉(원점회귀)
산행시간: 2시간 30분, 약 5km(중식 및 휴식시간 포함)
욕지도(欲知島)
욕지도 개요
한려수도의 끝자락에 별처럼 흩어진 39개의 섬을 아우르는 욕지면의 본섬으로 면적이 14.5km2에
해안선의 길이가 31km, 최고봉은 천왕봉(392m)이다. 통영을 한국의 나폴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혜의 항구이자 다도해의 많은 섬으로 가는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통영을 대표하는 섬 욕지도는
통영 삼덕항에서 32km, 뱃길로 1시간쯤 걸린다. 통영에서 남쪽으로 달리면 크고 작은 섬들이 즐비한
국도, 연화도, 노대도, 두미도 등과 함께 연화열도의 욕지면을 대표하는 섬을 만나게 된다. 연화열도의
맏형인 욕지도는 남쪽 끝 먼바다에서 거친 풍랑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고마운 섬이다. 욕지도
동항은 연화도, 우도, 노대도, 내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있어 호수처럼 잔잔하다.
욕지도의 유래
최근에 이곳 욕지도 동항리에서 선사시대의 조개더미 유적들이 연이어 발굴된 이래, 한반도 남해안
도서지역 석기시대의 성립과 더불어 해양을 통한 고대문화의 전파경로 및 교류의 성격 규명을 위해
고고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옛날 호주판관(湖州判官)의 도읍터였다는 전래의 속설과 더불어
삼국시대를 비롯한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등이 그동안 간간이 출토되었으며, 그 후 고려말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로 황폐화되자 한때 일본 대마도의 어선들이 이곳 황금어장에 상주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직후, 이 고장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면서 이곳 해역은
통제영에 속한 사량진(蛇梁鎭), 당포진(唐浦鎭), 삼천진(三千鎭) 등의 변방 수색 및 초계 정박처가
되었다. 매년 여름철이면 통제영 수군들이 사슴을 수렵하여 그 녹용을 진공품으로 조정에 올렸으며,
한말에는 통제영 소속이던 욕지도가 왕실 궁내부의 명례궁(明禮宮) 소속으로 잠시 직속되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우왕 4년(1378년) 8월 “배극렴이 욕지도에서 왜적을 물리치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1409년) 7월 15일 기록에도 욕지도란 지명이 등장함은 그만큼 오래됐다는
뜻이다. 욕지도에는 고려 말까지 주민들이 살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삼별초 연계와 왜구들의
노략질 때문에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하여 주민들이 육지로 대거 이주하였다. 욕지도에 공식적인
입도가 재허락된 것은 1887년(고종 24년) 조선시대 말엽이다. 1889년 개척자들이 처음 섬에 들어
왔을 때 수목이 울창하고 가시덤불과 온갖 약초가 뒤엉킨 골짜기마다 사슴들이 뛰어다녔다 하여
‘녹도(鹿島)’라고도 불렀다 한다. 욕지항 안에 또 하나의 작은 섬이 거북이 모양으로 목욕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욕지라 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유배지였기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이곳에서 욕된 삶을
살다 갔다 해서 욕지라 일컬었다고도 한다. 다른 설은 ‘생(生)을 알고자(欲智) 한다’는 화엄경의 구절에서
유래한 불교지명이라는 등 여러 지명유래설이 있다. 1973년도에는 1,376가구 8,101명, 초등학교
1,560명, 중학교 456명이었다. 1970년대까지는 남해안의 유명한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하였으나,
최근에는 욕지도를 관광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행정구역상 중세기 이래 고성현에
속하였고, 1900년 진남군 원삼면(遠三面)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09년 용남군(龍南郡) 원삼면,
1914년 통영군 원량면(遠梁面)으로 편입되었다가 1955년 통영군 욕지면에 속했다. 1995년에는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합되면서 통영시 욕지면에 편입됐다.
어업전진기지의 섬
욕지도는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했다. 입도 후 욕지도 주민들은 대체로 어업에 종사했다. 워낙 어장이
풍성했다. 욕지도는 특히 멸치의 주산지였다. 솔가지에 불을 켜서 멸치를 유인한 뒤 잡는 챗배
멸치잡이가 주요 어법이었다. 또 김경일과 김홍포 등이 들망을 발명해서 어업기술을 발전시켰다.
일본이 황금어장인 욕지도 바다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욕지도는 일제가 식민지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어업 이민지 중 하나였다. 1895년경부터 도미우라라는 일인이 욕지도를 들락거리며 조업을
하는 동시에 욕지도의 수산물을 매입해 일본에 팔기 시작했고, 1900년대 초반에는 아예 욕지도에
정착했다. 선박과 어구, 어업자금을 빌려주고 어민들의 것을 수탈해 갔다. 그가 정착한 곳이 욕지도에
고등어 파시가 열렸던 자부포(좌부랑께)였다. 일제 때는 고등어, 전갱이 등으로 풍어를 이루었고
남해안의 어업전진기지였다. 당시 욕지도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서울, 마산, 일본, 만주 등지로 수출됐다.
1915년경에는 조선인 2만864명, 일본인 2,127명 등 인구가 2만3,000명에 이를 정도로 섬이 번창했다.
지금 욕지도는 잡는 어업보다는 기르는 어업이 중심이다. 욕지 내항은 돔, 우럭 등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가득하다. 또 욕지도에서는 처음으로 고등어 양식이 시작되어 성공했다. 서울 등 뭍에서 먹는 고등어회는
거의 욕지도 산이다.
욕지도와의 인연
언론과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소매물도와 한산도에 비해 욕지도는 조금 덜 알려졌지만, 지금은 지나가는
여행지가 아니라 반드시 1박을 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만큼 보고 즐길 게 많다는
증거이다. 욕지도가 오늘날 경남 지방에서 대표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섬이 비교적 큰데다가 여객선이 들어오는 욕지도의 동항은 복주머니 지형으로 천혜의 항구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려한 섬과 별처럼 흩어진 바다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천왕봉(392m)을
등산하는 것은 최고의 섬 여행이 된다. 낚시꾼들에게는 유명한 출조지이고, 여름 한때만 몰려오는
피서지가 아니라 사시사철 언제든지 찾아와도 편안하게 쉬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차도선에 싣고 온 차량을 몰고서 21km 길이의 해안도로를 달리고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산행로를
따라서 등산을 하다 보면, 숨겨진 비경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보통 크기의 섬이기 때문에 첫 배로
들어왔다가 마지막 배로 나가도 여유가 있다. ‘욕지(欲知, 알고자 하거든)’라는 섬 이름처럼 남해상에
위치한 보통 크기의 이 섬에는 묘한 끌림이 있다. 경남의 대표적인 항구인 통영에서 32km, 1시간이란
적당한 거리에 있기에 부담이 덜하다. ‘욕지(欲知: 알고자 하거든)’라는 섬 이름처럼 욕지를 알고자
하려면 반드시 욕지도를 방문한 다음에야 알아내고 이해해야 한다. 남해의 외딴 섬 욕지도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개통 때문이다. 이후 주 5일 근무제 확산으로
통영 주위의 남해안 섬들이 주말 관광객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특히 욕지도 관광객의 증가는 침체된
섬 경제에 효자 역할을 하면서 소매물도, 한산도, 비진도와 함께 경남 최고의 여행지로 변신하였다.
별처럼, 점처럼 흩어진 남해 섬들의 맏형이 욕지도이다. 유동의 삼여도 새에덴동산, 원형의 전갱이
가두리 양식장. 아름다운 해수욕장, 낚시천국인 욕지도는 찾는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먹거리와 감동을
선사한다. 욕지도는 관광의 섬이지만 주민들이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것은 고구마 덕분이다. 보리를
베고 난 다음에 심는 고구마는 달고 분이 많아서 전국적으로 인기가 매우 높다. 2013년 10월,
욕지 개척 125년간의 역사를 기념하는 섬문화 축제가 열렸다. 욕지도를 개척한 그 분들의 정신을
기념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축제로, 이 행사를 통하여 섬 주민들의 친목과 더불어 관광객유치를
기대하고 있다. 축제기간 중에는 욕지의 어제와 오늘 사진전과 걷기대회, 윷놀이, 대동줄다리기,
거리 퍼레이드, 해군의장대 시범, 해군 고속정 견학, 욕지장터, 전마선 노젓기 체험, 바다생물 체험,
시 낭송 공연, 4륜 오토바이일주 등이 열렸다. 또, 고구마 캐기와 구워먹기, 고구마 요리대회, 가두리
낚시체험 행사가 선보였다. 한국의 유인도를 돌아보면서 욕지도처럼 활기차고 희망이 넘치는 섬을
별로 보지 못할 정도이다.
욕지도의 관광명소
욕지도 패총(欲知島貝塚, 경남기념물 제27호)
욕지면 동항리 일대 19필지의 조개무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3m 간격으로 격자망선을 설정하고
지름 2.5m 크기의 구덩이 17개를 파서 경작층, 흑색부식토층, 흑갈색점토층, 적갈색점토층으로
이루어진 4개의 층위를 확인하였다. 돌무지 시설은 모두 2기로 1기는 흑색부식토층에서 발견되었는데,
크기 10~20cm의 산돌과 냇돌을 길이 9m, 폭 5m의 범위로 깐 것으로 돌틈에 각종 토기와 석기,
동물뼈 등이 박혀 있었고 그 밑에서 2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다른 1기의 돌무지는 흑갈색점토층에서
발견되었으며 30~50cm 크기의 산돌로 지름 3m의 범위를 깐 것으로 단독무덤인 것으로 추정된다.
욕지면 메밀잣밤나무숲(천연기념물 제343호)
욕지도 마을 뒷산에 100그루 정도의 모밀잣밤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큰 나무는 높이 20m,
가슴높이 줄기둘레가 2m를 넘는다. 모밀잣밤나무의 껍질은 밋밋하고 잎은 끝이 뾰족하다.
숲이 울창하여 이곳에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덕동해수욕장(德洞海水浴場)
욕지도 남서쪽 덕동마을에 위치하며 해변에는 자갈이 깔려 있다. 바닷물이 깨끗하고 해수욕장에 숲이
있으며 주변에 낚시터가 많아 사철 사람들이 찾는다.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야영이 가능하다.
덕동마을에서 민박을 할 수 있다.
욕지도 일주
욕지도의 둘레는 17km, 자동차로 둘러볼 수 있게 일주도로가 깨끗하게 정비돼 있다. 산 중턱을
에두르는 일주도로를 돌다보면, 욕지의 순박한 삶을 만난다. 일주도로는 섬의 중턱을 깎아 만들었다.
일주 드라이브는 욕지항 선착장에서 시작해 섬 중앙의 천황봉을 중심으로 둘레를 한 바퀴 빙 돌게 된다.
불곡마을, 유동, 덕동, 고래머리를 지난다. 선착장 왼편에서 시계 방향으로 5분 정도 달리면 첫 번째
고개에 올라선다. 남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이다. 무수한 세월 동안 깎여 내린 해안
단애가 아슬아슬하면서도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일주도로 북쪽엔 가두리 양식장이 가득하다.
♣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에 속한 섬. 시청에서 남서쪽으로 약 25㎞ 떨어져 있다. 주위에는 상노대도
·하노대도·안거칠리도·밖거칠리도·초도·소초도·연화도·우도·두미도·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최고봉은 천황산(392m)으로 섬의 남동쪽에 솟아 있으며, 곳곳에 약과봉 등 급경사를 이루는 200m
내외의 산들이 있다. 섬의 동단이 크게 돌출되어 있으며, 이 돌출부와 이어지는 북동쪽 해안은 깊숙한
만을 이루어 항만으로 개발되어 있다. 북쪽 해안을 제외하면 대부분 높은 해식애가 발달한 암석해안이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며 비가 많다. 팔손이나무·동백나무·풍란 등이 자생하며, 모밀잣밤나무숲
(천연기념물 제343호)이 있다. 주민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농산물로는 쌀·보리·콩·고구마
·고추·밀감 등이 생산되는데, 특히 밀감은 재배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고구마는 생산량이 많아
농업협동조합 수매가 이루어진다. 연근해에서는 소량의 멸치가 잡히며, 미역·전복·장어 등의 양식이
이루어진다. 취락은 면소재지가 있는 북동쪽 동항리 일대와 해안 곳곳에 분포한다. 북부에 있는
목과마을에 고양이의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한국의 고양이 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적으로 섬의
서쪽 해안가에서 발굴된 욕지도패총(경상남도 기념물 제27호)이 있다. 동항리에서 동서방향으로
소로가 나 있으며, 북동쪽 만 안에 욕지항이 있다. 통영항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면적 12.743㎢, 해안선 길이 31㎞, 인구 1,527명(2015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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