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피아골
지리산 제일의 단풍 터널길로 널리 알려져
구례군 토지면 직전리에서 노고단이나 임걸령까지 울창한 원시림 속의 계곡길 14㎞를 오르는 코스이다.
가을철 단풍이 가장 손꼽히는 절경이지만 봄철의 진달래, 여름의 울창하고 시원한 녹음, 겨울의 환상적인 설경 등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가진 계곡이 이 피아골이다. 흔히 피아골에 관해서는 6?25 직후 적과 아군,
즉 피아(彼我)간의 치열한 싸움터였기 때문에 피아골이지 않은가 하는 얘기도 있고 피아골의 어감이 피를 많이 흘린
골짜기라는 연상을 심어주어서 그런지 6?25 당시 국군과 빨치산들의 격전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과거에 김진규, 노경희 주연의 반공영화 [피아골]이 나온 탓에 빨치산 소굴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해 [남부군]의 저자
이태 씨는 보급문제의 곤란 등 때문에 실제로 피아골을 근거지로 삼았던 도(道)단위 이상의 빨치산 부대는 없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편에선 임진왜란 때 치열했던 석주관(石柱關)싸움에서 피아골 이름의 유래를 찾기도 한다.
경상?전라도의 길목인 천연의 요새 석주관에서 칠의사(七義士)가 이끄는 승병과 의병들이 왜병과 맞서 싸우다가 모두
숨졌는데 이때 의병들의 피가 내를 이루며 흘렀다 하여 피내골(血川谷)로 부르다 피아골로 전화되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러나 석주관이나 피내골은 피아골과 지역적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이 또한 잘못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피아골이라는 말은 실은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稷田谷)이라 하다가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며 지금도 피아골 입구에 직전리(稷田里)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연곡사는 한때 의병들의 근거지
구례에서 혹은 하동방면에서 섬진강변을 따라오면 외곡리 검문소가 나오고 여기서 북쪽으로 2차선 포장도로를 다시 달리면
차창 밖으로 산비탈을 가득 메운 계단식 다랑이 논들이 많이 눈에 띄고 연곡천이 좌측으로 요동치며 흐르고 있다.
연곡사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토지면 내동리 평도(平道)부락이고 여기서부터 피아골 등반이 시작된다
(구례에서 직전마을까지 운행되는 완행버스편을 이용할 수도 있다).
민박집과 상가 건물이 있는 평도부락을 얼마 오르면 당재(堂峙)와 새미산 기도원으로 오르는 길이 우측에 보이고 다시
조금 가면 넓은 주차장과 광장이 나온다. 아직 집단시설지구 공사가 완료 안된 듯 곳곳이 파헤쳐져 있는데 매표소를 지나
조금 가면 우측에 연곡사가 나온다. 연곡사(燕谷寺)는 신라 진흥왕 6년(545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임잔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5년 소요대사(逍遙大師)가 복구하였지만 6?25동란 때 다시 파괴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81년 3월
구(舊)법당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것이며 경내에는 국보 53호인 동부도(東淨屠)와 국보 54호인 북부도(北淨屠)를 비롯하여 보물 4점 등 문화재가 있다. 또 연곡사는 구한말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고광순(高光洵) 등 수백 명의 의병이 진을 치고 유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高)의사의 순절비가 경내 좌측 동백숲속에 있다. 옛날 연곡사 경내에는
밤나무가 많아 왕가(王家)의 신주목(神主木, 位牌木)으로 봉납해왔고 또 지체 높은 승통(僧統)이 있어 승려들도 호기가
당당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옛보다 여러모로 초라한 느낌까지도 드는 절이다.
연곡사에서 나와 비포장도로를 따라 가면 좌측으로 갖가지 홈 파인 기암 위로 옥류가 시원하게 흐르는 것이 아름다운데
이렇게 30여분 가면 직전마을에 도착한다. 서울대 연습림 사무소가 길가 좌측에 있고 상가와 민박집도 보인다.
신비한 토종벌의 세계
피아골 일대는 널이 알려진 것처럼 한봉(韓蜂, 토종벌)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가을~이듬해 봄철 이곳 상가에서도
벌꿀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 벌들의 세계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토종 벌통 하나에는 보통 여왕벌 1마리를 최고 통치자로
수십 마리의 수펄, 그리고 2~3천 마리의 일벌들이 나름의 위계질서를 이루고 조직적인 분업생활을 하며 산다. 부지런히
꿀을 채집하여오는데 봄, 여름, 가을 동안 이렇게 해서 채집된, 하얗게 엉겨붙은 꿀을 가을에 사람들이 채취한다. 그리고
5월경에는 새끼벌을 치는데 이때는 사람이 벌통 주위에 상주하면서 이들을 새로운 벌통에 무사히 입주시켜야 하는 다소
까다로운 일이 생긴다. 기존의 집에서 분가할 때는 수천 마리의 벌들이 마치 집단시위를 벌이듯 주위를 맴돌다가 나무나
바위에 잠시 머무는데 이때(2~3시간 안에) 새로운 벌통으로 옮겨야지 만약 방치하면 가출하여 깊은 산야를 방황하게 된다.
소위 '자연석청'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때 놓쳐버린 벌들이 깊은 산속으로 옮겨와 자체적으로 바위틈이나 통나무 속에
살면서 꿀을 채집하여 생긴 것들이라고 한다.
토종꿀이라고도 말하는 이 한봉벌꿀은 꽃을 찾아 이동하면서 치는 양봉꿀보다 우수하고 효과가 뛰어나 고가에 팔리기
때문에 지리산 인근 주민들의 목돈 마련에 심심치 않게 기여하고 있다.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해마다 새끼를
쳐서 벌통도 늘려가기 때문에 유망한 소득 업종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이제껏 지리산의 온갖 꽃들이 풍부한 밀원(密源)을 제공하였지만 숲이 우거지고 점차 밀원이 줄어드는 추세라 어떤 마을에서는 양봉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덩치가 큰 양볼벌이 토종벌을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보호구역내에 양봉 벌통 반입은 규제된다. 벌통 앞에서 가만히 앉아 바라보면 때때로 번짓수 잘못 찾아 남의 집에 들어온 벌이 그집 벌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기하학적으로 정확한 육각형의 틀과
크기로 벌집을 지어가는 벌들의 신비한 공학세계도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연곡천 담수어가 줄어들고 있어
직전마을에서 산모퉁이를 하나 돌면 직전 윗마을이 다시 나타나고 민박집과 상가가 십여 채 보인다. 지난 1982년경 피아골
일대에 종합 학술조사를 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자료와 필자가 들은 바를 토대로 지리산 지역 민물고기 서식 종류를
참고로 나열해보면 꺽지(꺽저기), 피라미 등이 주종을 이루고 여름철 범람 후에는 뱀장어, 메기 등도 상류로 물을 차고
올라온다. 섬진강을 가까이 끼고 있는 연곡천에는 뱀장어, 피라미, 갈겨니, 쉬리, 돌고기, 눈동자개, 메기, 동사리, 밀어,
꺽지 등이 쉽게 목격되고 은어, 황어, 잉어, 모래무지, 참마자, 미꾸리, 줄공치, 숭어, 쏘가리 등도 연곡천 하류 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지리산의 계류는 대개 맑고 수온이 낮아 다양한 종류의 어류가 산란?서식하기에는 부적당한
일면이 있다고 하는데 또 제피나무 껍질을 말려서 빻은 가루 등 독극물에 의한 폐해와 밧데리 등 전기충격에 의한 불법
어획 행위도 담수어 어류상을 빈곤케 하는 또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섬진강과 그 연안 계곡 등은 그나마 다양한
어류상을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북쪽 엄천강 일대의 연안 하천에는 남강댐 건설과 인근 석재공장에서 내뿜는 뿌연 돌가루물
때문에 담수어가 옛날보다 급격히 줄어드는 안타까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직전마을에서 선유교까지는 30여 분 남짓 걸리는 넓은 길이다. 스기(杉)나무와 침엽수가 새로 조림된 듯한 선유교에서는
철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바로 계곡 우측으로 오르는 옛 길도 보인다. 시원하고 깨긋한 계류를 바라보며 선유교를 건너면
울창한 숲속에 야영장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옛 일제시대 때 이곳에서 표고를 재배하였다고 한다. 수백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야영장을 지나 반반하게 잘 다듬어진 돌길을 오르면 갖가지 활엽수가 울창하다.
졸참나무, 생강나무(아구사리), 오리나무, 서나무, 갯버들, 신갈나무, 산초나무, 초피나무, 등이 눈에 띄는데 가히
수목 전시장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 이 피아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곡에 홈 패인 암반으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2~3m의 아담한 폭포가 보이며 잠시 두 갈래 길이 나오지만 어디로 가나 다시 만나고 쉴 만한 바위 반석이
나오는데 계곡 건너편에 일본목련(후박나무)숲이 눈길을 끈다.
산도 물도 붉고, 사람마저 붉게 물들여지는 삼홍소
진달래가 몇 그루씩 보이고 계곡에는 아름다운 소들이 이어지면서 어느덧 삼홍소(三紅沼)에 도착한다. 1986년 11월
준공된 길이 30m의 삼홍교가 가로놓여 있는데 다리 위에서 보면 좌측 계곡가 바위에 '삼홍쏘'라는 페인트 글씨가 보이고
위쪽으로는 아담한 폭포가 서너 개 정도 이어져 있어 멋진 신비경을 이룬다. 울창한 수림과 흰 포말을 이루며 흐르는
계류가 장관인 삼홍교를 건너면 투박한 길이 잠시 나타나고 맞은 편 계곡(합수골)에는 폭포수를 이룬 지류가 흘러 내려온다.
오른쪽으로 잠시 꺽어지던 길을 가다보면 와폭의 연속인 계곡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구계포(九階泡)계곡에 이른다.
철다리(구계포교)가 놓여 있어 여기에서 위쪽을 보노라면, 완만한 암반 위로 영롱한 오색구슬들이 함박 쏟아지듯
층층계단을 타고 흐른다. 피아골의 계곡미의 극치를 이룬 곳이며 뒤에는 울창한 수림 속 잔잔한 수면 위에 천수를 다한
고목등걸이 얼굴을 처박고 있어 고풍스러 분위기도 보여준다.
구계포교를 건너 조금 가면 텐트 7~8동 칠 수 있는 평지가 나오고 얼마 안가 시원한 포말음과 함께 남매폭포가 나타난다.
높이 3~4m의 쌍폭포인데 짙 푸른 소로 쏟아지는 폭포수가 뼈속까지 시원하게 하며, 아래쪽으로 멋진 소들이 이어진다.
얼마 안 가면 다시 10m의 와폭이 눈에 보이다가 기억자(ㄱ)형 비박지가 있는 거대한 바위들과 만난다. 성벽 밑을 거닐 듯
높이 15m 정도의 이 바위병풍 밑을 지나면 출렁다리를 거쳐서 쇠줄을 붙잡고 경사 급한 곳을 오르게 된다. 거목들이
우거진 이곳을 오르면 평편한 쉼터가 나오고 여기서 완만한 길을 얼마 안 가 피아골 삼거리이다. 용수암과 질매재
방향의 두 물줄기가 모이는 곳이며 또 두 방향으로 각기 등반로가 전개되는 갈림길인 피아골 삼거리 숲속 공터에는
피아골 산장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 직전마을에서 이곳 피아골 삼거리까지는 거의 경사라곤 느낄 수 없을 만큼 완만하기도 하지만 계곡 양쪽으로 각기
길들이 나 있다. 대체로 잘 다듬어진 흔적이 역력한 걸로 보아 예로부터 도벌이 심했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점은
피아골 일대에 거의 침엽수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수림상태에서도 증명되는데 흔히들 말하는 '피아골 원시림'이라는
얘기도 달리 표현하자면 옛 수림상태가 잘 보존된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다만 온갖 활엽수들만이 밀집?군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피아골 단풍도 어떻게 보면 이러한 부조리한 일면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인골 한 트럭분이 나왔던 피아골산장터
피아골산장은 지리산의 뭇 산장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계곡변에 위치하고 있다. 좌우로 물이 흘러서 산장 앞에서 만나는
그리고 양쪽으로는 능선이 둘러쳐 있어 금방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지난 1984년 82평방미터, 60명
수용규모로 이 산장이 지어졌는데 온통 돌투성이닌 주변과는 달리 지금 산장터는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산장 앞 50m 전방에 있는 화장실 건물터도 마찬가지(함태식 씨의 설명에 의하면 풍수지리상 산장에서 앞의 합수물이
안 보여야 천혜의 명당인데 바로 화장실 건물이 그 역할을 한다고). 1984년경 산장을 지을 때 유일한 흙지대인 지금의
산장터에서 거의 한 트럭분의 매장된 인골이 나왔다. 옛 빨치산들의 유해인데 지리산 여타 지역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누렇게 잘 썩은 이 뼈들은 그후 무슨 특효가 있다고 믿은 나병환자들 차지가 되었다.
아직껏 역사적으로 복권되지 못한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영혼마저 올바로 천도되지 못하고 구천에 맴돌아야 하는,
비참하게 이 골짜기에서 죽어간 패배자들을 잠시 생각해본다.
피아골산장 동쪽에는 암봉 하나가 눈에 띈다. 옛날 사명당(유정)이 피아골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곳 위에서 의병을
작전 지휘하던 곳이라고 전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흰덤봉('흰 무덤'이라는 뜻)으로 불리는 봉우리이다.
피아골산장에서 서쪽으로 가면 경사가 심하고 투박한 돌밭길을 올라 질매재에 이르고 여기서 노고단까지 능선길로 해서
오를 수 있다. 피아골산장 우측으로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산죽도 듬성듬성 있는 울창한 숲속으로 계속 가게 되는데
얼마 안 가서 좌측에서 지류와 만나는 곳에 아치형 교각의 철다리가 나온다. 길이 20m, 폭 1m의 불로교이다. 철다리를
건너면 용수암(龍水岩) 삼거리 이정표가 있고 갈림길이 전개되는데 여기서 가파른 좌측 비탈길로 올라야 한다. 10여 분
오르면 길이 잠시 완만해진다. 다시 나무뿌리가 노출된 길을 갈지자를 그으며 힘들게 오르면 평탄한 산죽밭이 나온다.
옛 초암터이다.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많은 흙길을 오르면 뒤로 왕시루 능선이 나타나고 또 한차례 오르면 좌측으로 암봉이
보인다. 소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들이 서서히 짙어지는데 이렇게 약 1시간 넘게 오르면 삼도봉과 불무잔등 능선 전모를
드러내다가 임걸령이 훤히 보이는 능선위에 올라선다. 잣나무를 돌아서 숲을 오르면 임걸령 삼거리가 나온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질매재까지 그리고 임걸령 삼거리까지는 급경사길이다.
식수 준비하고 쉬엄쉬엄 여유를 갖고 오르기 바란다.
피아골 종녀촌의 기이한 전설
옛날 피아골의 깊은 골짜기에는 종녀(種女)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해온다. 종녀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집에
팔려가서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자기생업으로 하는 소위 '씨받이 여자'를 말한다. 피아골에 있었다는 종녀촌에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성신(性神)어머니를 비롯하여 그 밑에 많은 종녀들과 시동(侍童)들이 절대 순종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가능했던 이 기이한 풍습 때문에 때때로 종녀들은 갖은 수모와 학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어느 집에 팔려 들어가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타의에 의해서 혈육의 정을 끊고 되돌아서야만 했고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그 딸을 종녀촌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종녀로 길러 불행한 운명의 길을 대물림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녀들의 피눈물 어린 통한의 인생 살이와는 달리 많은 종녀들을 거느린 성신어머니는 종녀들의 희생과 순종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향락을 즐겼는데 자주 성신굴에 찾아가 성신(性神)의 제단 앞에서 무궁한 생산을 비는 기원제를
올렸단다. 은촛대에는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성신상과 남근(男根)이 새겨진 제단 앞에서 성신어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입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 던지면서 성신가(性神歌)를 부르며 관능적인 춤을 추다가 흥분의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어울려 한바탕 욕정을 불태우곤 했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피아골 종녀촌의 애절한 전설은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우리 중?근세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리산 피아골은....
절경의 폭포, 소와 담의 연속 피아골 지리십경 중 하나로 꼽히는 ‘직전단풍(稷田丹楓)’은 바로 피아골 입구 직전 부락
일대의 단풍 절경을 일컫는다. 피아골은 이러한 단풍 절경 때문에 단풍 산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잠룡소, 삼홍소,
통일소, 연주담, 남매폭 등 자연미 뛰어난 소와 담, 폭포가 골을 따라 연이어져 여름 계곡 산행지로도 인기 높다.
계곡풍광이 수려한 피아골대피소까지는 2시간, 대피소에서 임걸령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피아골은 지리산 주능선 상의 삼도봉과 노고단 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모여드는 골짜기로 동으로는 불무장등(1,446m)
능선, 서로는 왕시리봉(1,214m) 능선 사이에 깊이 파여 있다. 피아골은 자연미가 뛰어난 경관과 단풍으로 잘 알려진
골짜기로 등산로뿐 아니라 일반 타방객들에게도 인기있다. 또한 불무장등은 남부능선과 왕시리봉 능선과 함께 지리산
남부를 대표하는 긴 능선으로 종주파 산행인들이 찾는 산행 대상지이다.
▶ 피아골(직전 - 피아골 - 용수암 - 임걸령)
지리10경 중 하나로 꼽히는 직전단풍은 바로 피아골 입구 직전 부락 일대의 단풍 절경을 일컫는다.
피아골은 이러한 단풍 절경 때문에 단풍 산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잠룡소, 삼홍소, 통일소, 연주담, 남매폭 등
자연미가 뛰어난 소와 담, 폭포가 연이어져 있어 여름 계곡 산행지로도 인기가 높다. 도로 사정이 나빴던 시절에는
제비가 나는 형세의 명당터에 들어서 있다는 연곡사에서 산행을 시작했으나, 요즘은 직전 부락까지 도로가 잘 닦여 있고
노선버스도 다니고 있어 여기서 시작한다.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연곡사는 6.25때 전소한
이후 새로 중건한 사찰이지만, 동부도, 동부도비, 북부도 등 국보와 삼층석탑, 현각선사탑비, 서부도 등 귀중한 문화재가
여럿 있어 산행에 앞서 들러볼 만하다.
직전 부락 마지막 민박 겸 음식저인 산아래첫집을 지나면 포장도로는 끝나고 숲이 울창한 비포장도로가 500 여m 이어진다.
선유교를 건너면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이후 연주담, 통일소, 삼홍소 등 깊이를 가느할 수 없고 신비로운
소가 나타난 다음 삼홍교와 구계포교를 건너서면 피아골대피소까지 계속 골짜기 왼쪽으로 길이 나 있다.
구 게포교에서 대피소까지 1.5km 구간은 98년 수해로 피해가 컸던 지역으로, 99년 새로 다듬은 등산로는 사면을 타고
이어진다. 계곡 절경은 대피소에서 대강 끝을 맺는다. 따라서 계곡 또는 단풍 산행만 즐길 생각이면 이쯤에서 되돌아
서는 것도 좋다. 피아골대피소에서 골짜기를 따라 10분쯤 오르면 용수암 삼거리가 나타난다. 여기서 계속 계곡길을 따르면
용수암을 거쳐 삼도봉 서쪽 안부로 올라서고, 왼쪽 지능선 길을 쫓으면 임걸령 서쪽 안부 삼거리로 이어진다.
임걸령 방향 길이 삼도봉 서쪽 안부 길에 비하면 잘 다듬어져 있지만, 줄곧 턱 높은 계단이 연속돼 힘이 많이 들고 지루한
편이다. 산행 시간은 각각 4시간 정도 걸린다.
임걸령쪽에서 내려설 때에는 임걸령 샘에서 노고단쪽으로 향하다 첫번째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른다.
마치 샘쪽으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남쪽) 길을 따르면 피아골로 내려서게 된다.
[서울신문 조용섭의 산으路]에서 전남 구례 지리산 피아골
‘붉게 타들어 가는 산자락에(山紅) 물도 붉게 물들고(水紅), 이를 보는 사람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人紅) 삼홍(三紅)이라.`
현란한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피아골의 가을 단풍은 이 삼홍소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피아골은 잘 알려진 대로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상흔이 깊게 서려 있는 곳. 결코 가볍고 밝은 화사함만으로 대할
곳은 아니다. 강영환 시인이 그의 시 ‘빨갱이-삼홍소’에서 “이 골 붉은 색 끝은 어디에 있는가.”라며 조심스레 실가닥
한 올을 꺼내보이는 것도 아마 그 이유에서 일 것이다.
단풍 감상을 위해서는 시간대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산길은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거쳐 임걸령 삼거리-피아골
대피소-직전마을에 이르며, 한낮의 밝은 햇살 아래 골짜기를 지나는 코스로 잡았다.
너무도 잘 알려진 지리산의 산길, 특히 주능선 길에 대한 설명은 그리 필요치 않다.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에 이르는
포장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오른쪽 출입통제 안내판이 서있는 곳에서 능선과 합류하는데, 바로 성삼재-종석대를 이어 온
백두대간마루금이고, 화엄사에서 오르면 코가 닿을 만큼 가파른 길을 올라서게 되는 코재도 지척이다.
성삼재에서 넉넉잡고 1시간이면 노고단대피소에 닿는다. 노고단 정상은 자연휴식년제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대피소 취사장 옆의 돌길을 올라 노고단 고개에 닿으면 정면(東)으로 시계(視界)가 트이며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천왕봉이
손짓한다. 왼쪽 10시 방향의 넉넉한 반야봉과 오른쪽 돌탑을 이고 있는 노고단의 모습은 늘 짠한 감정에 휩싸이게 한다.
산길은 정면으로 내려서며 본격적인 주능선 길로 접어드는데, 아주 수월한 길이다. 짙은 숲길을 벗어나면 정면으로 공간이
열리며 이내 돼지령에 닿는다. 오른쪽(南)으로 길게 드리워진 능선 저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가 왕시루봉이다.
편안한 산길을 달리듯 걷다가 숲으로 들어서게 되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흔히들 말하는 임걸령 삼거리(이정표:피아골
삼거리)를 만나면 주능선 길을 버리고 오른쪽 피아골대피소 방향으로 들어서야 한다. 노고단에서 1시간 30분 소요. 숲을
들어서면 오름길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는 힘든 계단길로 내려서며 불로교를 지나 피아골 대피소에 닿는다.
삼거리에서 1시간 30분 소요. 피아골대피소에는 지리산 호랑이로 잘 알려진 함태식 선생이 기거하고 계신다.
대피소 주변의 풍광에 잠시 눈길을 둔 뒤 다리를 지나면, 계곡을 왼쪽에 두고 산사면 혹은 다리를 지나며 산길이
이어지는데, 이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아름다운 풍경과의 만남에 대비할 일이다. 대피소에서 1시간 정도 진행하면
삼홍소에 이르고 이내 표고막터다. 짙은 숲 사이의 너르고 호젓한 길을 40여분 걸으면 직전마을에 닿고 산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