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개요:
지리산 중북부능선에 현존하는 칠암자가 있다면 지리산 동북부자락에는 현존하지 않는 칠암자터가 있습니다. 건물은 없고 단지 터만 남아 무상한 세월을 지켜온 신비의 절터! 험난한 지리산 속 인적을 허용치 않은 절묘한 자리가그곳에 있습니다. 지리애호가모임 ‘지리99팀’이 끈질긴 탐구 끝에 찾아낸 쾌거이기도 한곳, 흩어진 이 암자 터를 연결하는 산행을 합니다. 함양군 휴천면 엄천강에 자락을 뻗힌 산등성이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하나가 눈길을 끄는데 바로 ‘함양독바위’ 전설에 의하면 한 부인이 바위사이에 돌을 쌓아놓고 그 안에서 홀로 기거,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랐다하여 ‘독녀암(獨女岩)’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곳, 함양 휴천에서는 독아지의 ‘장독바위’, 마천에서는 붓끝의 ‘필봉(筆峰)’, 산청 화개에서는 상투머리의 ‘상투바위’로 각각 달리 부른다는 바위입니다. 마치 함양 독바위를 우두머리로 한 듯, 감춰진 칠암자 터를 차례로 찾아보고 하산길 보너스로 한국판 피사의 탑이라 일컫는 신비의 공개바위를 구경하고 바위굴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천상바위 능선으로 하산하는 산행코스
<김종직>선생은 선열암(先涅庵)을 돌아본 뒤 찾아간 신열암과 독녀암에 대한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열암(新涅庵)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암(獨女巖)이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척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기거하면서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 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 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 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 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본문에서 지칭한 독녀암은 상세한 서술과 뚜렷한 형상 덕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함양 독바위 임을 쉽게 풀 수 있게 되었으며,
이렇게 밝혀진 독녀암은 신열암을 추정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지리산에 독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최소 3개 있다.
[진주 독바위]라 일컫는 동부능선 상의 쑥밭재에 있는 독바위,
상불재에서 내삼신봉가는 길에 청학동 삼성궁으로 떨어지는 능선에 있는 독바위,
그리고 [함양 독바위]라 불리는 [노장대]가 그것이다.
독바위의 일반적인 어원을 대입해 보면,
쑥밭재에 있는 독바위와 상불재 위의 독바위는 여러가지 어원 중의 하나에 해당이 되는데
[함양 독바위]는 삼정산능선에서나 혹은 쌍재 부근에서 보면 홀로있는 바위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섯개의 바위 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수사에서 바라볼 때 우측으로 이어진 암군을 고려하면 독바위란 이름은
그렇게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1472년도 천왕봉 등정로를 복원해 보기엔 아직도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많이 남았지만 방곡-운서리 경유설과 의탄 경유설을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주고 있으며
600년 전의 등정로가 쉽게 풀릴것 같은 자신감이 충만하여
생각만 해도 어름터를 안고 이어진 동부능선으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김종직 선생이 함양을 출발하여 영랑대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에서 수많은 지명이 등장하지만
현재 지명과 일치하는 곳은 한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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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열암에 들렀는데 승려는 없었다. 이 암자 또한 우뚝한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노장대 바위 중에서 그 아래 신열암이 있었을 남서쪽 가장 큰 바위의 뒷모습
암자 동북쪽에 바위가 있는데 [독녀암(獨女巖)]이라 하였다.
다섯 바위가 떨어져 서 있고, 높이가 모두 1천여 자나 되었다.
*다섯개의 거대한 바위로 구성된 노장대(노장대 올라가는 금속계단이 보인다.)
전하는 말에,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하여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돌을 쌓아 놓은 것이 여태 남아 있었다.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었다는 흔적
위로 올라가려는 자는 나무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바위틈을 돌고 돌아
등과 배가 모두 긁힌 뒤에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상한 알미늄 사다리를 설치하여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데 사다리를 올라선 곳
내 일찌기 산음(산청)을 오가며 이 바위를 바라보았는데,
여러 봉우리와 함께 우뚝 솟아서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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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출판사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중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중에서)
전설 같은 이야기가 덧붙여졌지만 다섯 바위가 떨어져 서 있고, 그 사이에 거처를 만들만 한
곳이라 하였는데 그 독녀암이 바로 [함양 독바위]가 아니고 무엇이랴 !
물론, 독바위의 일반적인 어원인 바위 그 자체를 일컬어 옛날부터 독바위라 하다가 후대에 [독]자에
착안하여 [독녀]의 전설을 덧붙였을 수도 있겠고 허구만 제외하고 실제 여자 혼자 거처한 근거로 독녀암이란
이름을 얻었다가 독녀암의 [독]자를 인용하여 독바위라 전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김종직 선생의 천왕봉 등정로 상에 있는 [독녀암]이 [함양 독바위]이며
우리는 김종직 선생의 등정로 추적에 한발 크게 다가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함양독바위]를 [노장대]라 하는데 [노장대]의 지명 근거를 찾을 길이 없다.
함양군청에 문의하였으나 담당자에 따르면 [동네 주민에게 물어보아도 노장대라 한다]는 것만 분명할 뿐
함양문화원에 문의하여도 알 길이 없다며 오히려 찾게되면 알려달라는 부탁을 되려 받았다.
아무튼 [노장대]라 불리우게 된 사유가 분명 있을텐데 풀어야 할 별도의 숙제다.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군에는 피사의 사탑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5층 바위탑이 있다.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야산 755m 능선에 있는 이 바위탑은 5개의 정육면체 바위로 이뤄져 추정 무게만 100t,
높이 12.7m, 둘레가 12.4m나 된다. 산비탈 경사가 60도나 되는 곳에 서 있는 5개 돌덩이는 25도 각도로 곧
기울어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등산로에서 한참 벗어나 있어 그 동안 인근 마을 주민들만 존재를 알다가
최근에야 모습이 공개됐다. 하지만 자연석인지 아니면 토속신앙을 위해 만든 인공탑인지 알려지지 않으며,
언제 만든 것인지 산청군에도 기록이 없다. 다만 마고할미라는 거인이 5개 바위로 공기 놀이를 하다 쌓아 놓고
갔다고 하여 ‘공개바위’로 불렀다는 전설이 있을 뿐, 지역 주민들도 이 바위탑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여기고 있다.
지리산 7부 능선, 인적이 드문 깊은 숲 속, 미스터리 한 바위 탑, 사람이 쌓았다고 하기엔 그 크기가 너무나 거대하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기엔 그 형상이 너무나 신비로운 바위 탑.
비스듬히 쌓인 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 바위 탑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지리산 깊은 숲 속
오랜 세월 숨어있던 거대 5층 바위 탑의 실체를 SBS '순간포착 ! 세상에 이런 일이‘ 에서 그 미스터리를
공개 했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어 그동안 인근마을 주민들만 그 존재를 알다가 최근에야 모습이 공개 되었다.
하지만 자연석인지 아니면 토속신앙을 위해 만든 인공 탑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언제 만든 것인지 산청군에도
기록은 없다. 다만 마고할미라는 거인이 5개 바위로 공기놀이를 한 뒤 떠나 공개바위로 불렀다는 전설이 있을
뿐이어서 지역주민들도 이 바위 탑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다. “사람이 쌓았다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자연이 만들었다기엔 형상이 너무 신비스럽다며” 전문가 등의 현장 확인결과 지렛대로 바위를 이동 시킬 수 없을
만큼 가파른 지점에 있어 자연풍화작용으로 돌탑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공개바위라는 확실한 어원은
공기 돌 놀이(5개)의 경남 서북부 방언은 공개놀이라 하며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이에 연유되어
공개바위라고 불렀다. 방언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이미 고유명사화 된 것이어서 공개바위라고 합니다.
공개바위에 대해서 인근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는 전설은 마고할미와 관련이 되어 있더군요.
마고할미는 삼베 구만필을 해 입을 정도로 거인이었으며, 마고할미가 하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땐
함양 쪽에서 흉년이 들었으며 함양쪽으로 보고 있으면 하동쪽에서 흉년이 들 정도로 거인이었다고 하는군요.
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하여 열매를 맺게 하거나 뿌리에 영양소를 저장하여 사람들에게 양식을 제공하여 주게
되는데 바로 마고 할미가 햇빛을 가려 버려서 흉년이 들게 하였다니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다 그렇듯이 다분히
해학적이면서 우수꽝스런 이야기이지요.
<고열암에서 자다[宿古涅庵]> 안내문 내용
병든 몸을 지탱하고자 하여
잠시 포단을 빌려 깔고 자는데
소나무 파도가 달빛 아래 들끓으니
구곡에 노니는 듯 착각케 하네
뜬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고
한밤중엔 바위 골짜기 닫혀 있구나
오직 정직한 마음을 가진다면
혹 산신령의 비록(備綠)을 얻을는지
-김종직의 “유두루록” 중에서-
위의 글은 <김종직 ; 조선초기 성리학자, 호는 점필재, 함양군수 역임(1470년~1475년),
1472년 지리산 기행문 “유두루록” 지음> 선생이 함양관아에서 출발하여 지장사, 선열암, 신열암 등
세 암자를 거쳐 그 날의 숙박지인 고열암에서 산행 첫 밤을 묵은 후 지은시
고열암 터.↘
망실공비 3인부대'로 불렸던 정순덕, 이홍이(희), 이은조가 군경의 추격을 피해 1962년까지 숨어 지낸 선녀굴
이은조는 그해 선녀굴에서, 이홍이는 이듬해 산청에서 각각 사살당하고,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같은 날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 당한다. 여순사건부터 치자면 무려 15년이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 쳐도
10년만이었다. 송대마을에서 3㎞쯤 떨어진 선녀굴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는 데다 좁은
입구와는 달리 안이 넓은 2중 동굴이어서 굴 내부에서조차 안이 잘 보이지 않아 빨치산의 은신처로 적당한
곳이었다고 한다. 근방에는 이와 비슷한 동굴이 5개나 더 있다고 한다.
이름에선 선녀굴은 예쁘고 고우나 걸맞지 않게 처절한 한국전쟁의 비화를 안고 있는 곳이다.
빨치산 정순덕이 지리산에서 최후의 3인부대로 떠돌던 중 3인중의 한 사람인 이북출신의 남파 공비인
이은조(45세)가 사살된 현장이다. 1961년 12월 어느 날 선녀굴 앞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중 토벌대의 총격에
이은조가 사살이 되고 나머지 잔비 정순덕과 이홍희는 이은조의 시체를 선녀굴 석간수 바로 앞에 대강 매장을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 1963년 11월 정순덕이 내원골에서 체포되어 산청경찰서에 수감 중
이은조의 주검을 확인하는 현장검증이 이루어지던 날 이었다고 한다. 경찰들과 수사관들이 체포당시의 총상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한 정순덕을 한 촌부의 지게에 지고서 선녀굴로 향하는데 지나는 마을사람들로부터 돌멩이가
날아들었다는 얘기가 있기도 하다
최후의 빨치산 故 정순덕 여인의 진술기록
나는 1933년 6월20일(음력) 아버지 정주삼씨와 어머니 진도원씨의 1남4녀 가운데 둘째 딸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하여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자료발췌)